尹은 상해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을 볼 필요.

▲조맹기 박사 / 前 서강대학교 교수
▲조맹기 박사 / 前 서강대학교 교수

 

윤석열 대통령이 흔들리고 있다. 그의 소명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정치권의 흐름은 의원내각제, 연방제통일안이 설득력을 얻어간다. 상해임시정부 당시도 그렇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원했고,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국회)이 권력을 갖고 있는 전통이어서 의원내각제를 원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일제가 1925년 11일 1차공산당 사건으로 러시아(소련)에 경도된 사회주의 계열을 일망타진했다. 이 말은 상해임시정부는 공산주의 계열이 깊게 뿌리 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의원내각제이지만, 러시아의 선전, 선동술, 포퓰리즘, 인해전술 등으로 금방 한반도를 삼킬 수 있는 심산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다시 역사적 전면에 나선다. 尹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도 정신을 차려야 자유를 확보할 수 있고, 아니면 자유를 헌납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SkyeDaily 특별취재팀 한원석 부장∙윤승준 기자∙민진규 국가정보전략연구소장(2022. 11.24), 〈시진핑 독재에 무너진 홍콩금융〉, 〈헥시트(Hongkong+Exit)에 추락하는 홍콩..정치는 경제 못 이긴다.〉, 중국은 홍콩을 심키고, 공산주의 신분집단제를 강화시키고 있다. 조선시대, 청나라 전제군주제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국민이 잘 사는 것과는 관계어 없다. 권력 중독자가 말은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들의 권력 유지에 관심이 있다.

문재인 청와대는 공산주의 대열에 낄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속이 탄다. 조선일보 최경운 기자(11.24), 〈尹대통령 ‘수출은 경제 동력, 환경부도 나서야’-무역 적자에 첫 수출전략회의 ‘공무원은 기업 도와주는 조직’〉,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첫 수출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수출은 우리 경제의 동력’이라며 직접 수출 문제를 챙기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또 ‘환경부도 환경산업부가 돼야 한다’며 모든 부처가 수출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올해 무역 적자가 400억달러에 육박하는 등 한국에 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를 수출 증대로 돌파하기 위해 정부 역량을 수출 진흥에 모으겠다는 것이다...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서초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열린 제1차 수출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윤 대통령은 이날 관계 부처 장관과 민간 전문가들이 참석한 제1차 수출전략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수출은 오늘날의 한국 경제를 만들어낸, 국민 일자리의 원천’이라며 ‘수출 증진을 위해 정부의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글로벌 복합 위기 상황에서 수출 증진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고 최첨단 기술 집약 산업 분야가 수출을 이끌어가야 한다’면서 ‘(앞으로) 수출 전략 회의를 주재하며 수출 증진 전략과 풀어나가야 할 문제점을 직접 점검해 나가겠다’고 했다.”

尹 대통령은 왜 화물연대 파업을 계속 끌고 가는지...한국경제신문 곽용희∙장강호∙강경주∙황정환 기자(11.23), 〈‘주유소 기름 바닥내라’…화물연대 도 넘은 '폭주'〉, “대체투입 차량 준비 23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공공운수노조가 열흘간의 총파업에 들어갔다. 공공운수노조를 시작으로 다음달까지 화물연대, 학교 비정규직 노조, 전국철도노조 등 노동계 파업이 줄줄이 예고돼 있다. 이날 경기 의왕시 ICD 제2터미널에서는 군 관계자들이 화물연대의 파업에 대비해 대체 투입할 비상 수송 차량을 준비하고 있다. 뉴스1...24일 0시 파업에 들어가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화물연대본부가 조합원에게 ‘주유소 기름을 바닥내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화물연대 SK에너지·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GS칼텍스 지부 조합원에게 유조차(오일 탱크로리) 운행 전면 중단과 함께 모든 파업 차량에 기름을 가득 채워 ‘기름 부족’ 상태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다. 투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파업 불참 차량은 물론 일반 시민까지 볼모로 잡겠다는 발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통령직이 흔들리면 당장 미국도 태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11.24), 〈이태원 참사처럼 미·북 핵군축 회담 온다〉, 1953년 ‘에치슨 라인’은 긋고 나선 미국 분위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로비력으로 이를 막고 한미동맹을 성공시켰다. 그게 다시 흔들릴 가능성이 제기 된다. “이제 국민에겐 별 관심도 없는 주제가 됐지만 북한 핵 사태가 결국 어떻게 될지에 대해 떠올려보는 그림이 있다. 언젠가는,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미국과 북한이 이른바 ‘핵 군축 협상’의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될 것으로 본다. 북한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핵 군축 협상의 기본 전제는 당연히 북한 핵 보유의 공식 인정이다. 북한이 핵 탄두 개수를 줄이고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탄(ICBM)을 축소, 폐기하는 대신 한미 동맹의 성격 변화와 주한미군의 대대적 감축 카드가 테이블 위에 오를 것이다.”

역사는 반복이 된다. 역사의 맥락을 일별하자. 尹 대통령은 지금 상황과 비교하여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국부가 둘’ 택도 없는 소리이다. 그건 포퓰리즘 접근이다. 그 논의에는 ‘민주공화주의’ 정의가 없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중국과 북한식 신분사회 고착화이다.

그는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학사(1905.1.〜1907. 6), 하바드에서 석사(1907. 9.〜1908. 8.), 프린스턴 박사(1908.9〜1910.6)를 취득했다. 학사학위는 프린스턴 대학 정치학 전공에서의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재임 1913〜1921)으로부터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의〕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e the United States)”로 그 구체적 내용은 ‘중립무역’에 관한 것이었다.

李 대통령은 프린스턴 대학 재직시 신학에 관한 강의를 몇 개 듣기도 했다. 당시 윌슨 총장은 새 대학건물을 위한 프락타(Proctor) 씨로부터 기부금전을 에워싸고 신랄하게 웨스트(Andrew F. West) 대학원장과 다툼 끝에 그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대학을 떠났다.

윌슨 총장 가족은 평상시 항상 친밀한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들은 李 대통령에게 감옥생활과 한국의 선교 그리고 장차의 사업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이정식, 1995, 126쪽). 특히 윌슨 대통령은 李 대통령에게 사카고, 프린스턴 뉴저지, 시거스트 워싱턴 등지를 다니며 한국독립 연설(1012.6.19.〜12, 대선기간)을 하도록 추천서를 써주었다(이승만, 1995, 482쪽). 그들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교수와 학생 사이었고, 윌슨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론 윌슨은 1902년부터 프린스톤 총장직을 맡고 있는 형편이었어, 학과 일에 충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윌슨은 프린스대 출신으로 존스홉스킨대학의 정치학 박사였다. 그 후 뉴저지 지사, 미국 대통령의 길을 걸었다.

한편 윌슨은 1912년 11월에 대선에 당선되고, 8년 간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윌슨 대통령’은 19019년 1월부터 ‘민족자결주의’(약소민족 해방론)를 강변했다. 그 논리에 따르면 민족국가는 개인의 자유∙정의∙평등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위로 묶여지는 결속체였다.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다른 국가와의 적자생존 경쟁을 염원했다. 즉 개인의 주체성, 그리고 세계 속의 주체성을 지닌 민족국가의 건설은 당시 개인적∙국가적 과제였다. 여기서 민족적 자주 의식과 역사의식을 가진 민족주의가 정신적 지주로 등장했다.

조선∙대한제국의 신분사회로 압제는 심해졌다. 일본의 무단정치는 그 강도를 높여갔다. “‘조선은 법률이 없고 사정이나 압제로 행세하는 나라이니..’ ‘무엇을 청구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공갈이 태심하다.’”(이승만, 1903.3.30.). 또한 ‘외국 사람이 내 나라에 와서 내 나라 사람을 잡아다가 때리고 가두기를 임의로 한다.(이승만, 1903.03.11.).

일제의 무단정치가 강화되면서, 눌린 백성이 동시에 봉기하기에 이른다. 기미독립운동(1919. 3. 1.)이 벌어졌고, 노령임시정부(3.12)에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추대했다. 물론 그들은 이승만의 이름이 필요했고, 미국에서 윌슨의 도움, 독립후원금 모금 등 선에서 끝나기 바랐다. 국무총리, 대통령을 그들이 정해서 통보하는 수준이었다. 즉, 이승만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부서 결정은 전하는 소식으로만 들었을뿐으로, 여러 차례 상해로부터는 ’잠깐 왔다 가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좀처럼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서정주, 1949, 254쪽)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4∙13) 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으로 피선(6∙14) 되었다. 사실 국무총리에게 국무회의를 주도하고 있어, 임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명칭도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였다. 그러나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Korean Republic) 명칭으로 美英佛伊에 정부수립을 정식 통고하고, 그 때부터 한국 국제명칭(Republic of Korea)을 공식 발표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중앙총회장, 안창호)는 1919년 2월 ‘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명의로 작성한 위임 통치 청원서를 윌슨과 미국 신문사에 송부하였다. 그 내용 세가지로 ①열강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며, ②열강은 장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며, ③한국을 일정 기간 국제연맹의 통치에 둘 것 등을 청원서에 담았다. 당시 ’신채호는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기도 전에 나라를 팔았다’고 성토하였고, 이동휘 국무총리는 총리를 사임하면서 ‘위임통치청원을 외교적 대실패’라며 비판하였다.

임시의정원은 결국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을 탄핵, 면직시키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탄핵 이유로 ①이승만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거의 머물지도 않았고, ②소극적태도로 직에 임하였으며, ③국고 수입 방해, ④헌법질서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등의 상해 임시정부 헌법에 근거하여 탄핵을 시켰다(박찬승, 2014, 30쪽).

물론 국내나 상해에서 실질 파워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일본인으로 볼 때 이승만 자신의 명성과 미국의 교계, 미국 정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계몽의 정도와 생각의 깊이 그리고 미국 언론을 동원시킬 수 있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李 대통령은 1919년부터 1943년까지 꾸준히,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이며 효과적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과 국무장관들에게 임정 승인을 요청하는 문서 외교를 전개했고, 구미위원부를 통해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잡지와 단행본, 팸플릿 등을 영문으로 출판, 배포했으며, 워싱턴회의와 제네바 국제연행 총회에 임정의 대표로 참가해 각국 외교관들과 언론인들에게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주지시켰다.(이승만, 2012, 64쪽).

한미동맹이 이런 분위속에 얻은 결과이다. 그게 지금의 대통령 중심제이다. 지금 대통령 중심제를 의원내각제로, 대통령을 ‘가오 마담’으로 세울려는 의도를 국민들도 잘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게 중국과 북한이 원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국민이 나서 ‘민주공화제’를 지킬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안동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