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 담론 형성에 실패한 좌파.

▲조맹기 박사 / 前 서강대학교 교수
▲조맹기 박사 / 前 서강대학교 교수

 

좌익은 원래 담론 형성의 명수들이다. 그러나 문재인 5년은 담론형성에 실패했다. 이념과 코드는 진정 포퓰리즘에 도취되어, 이념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반지성주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념을 포기한 ‘패거리’ 된 것이다. 김일성의 국가와 민족주의에 도취하여, 시민으로서의 인간을 놓친 것이다. 마르크스좌파 이론에서 멀어진 사이비 좌파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는 혹독한 겨울을 경험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레닌과 스탈린과는 달리 국가주의에 익숙하지 않다. 그는 사회, 즉 시장사회의 분석에 관심을 가졌다. 설령 그가 사회주의를 말해도, 그 사회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이다. 감성과 애국심 같은 것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시장사회에는 원래 수요와 공급에 의한 이성과 합리성으로 움직인다. 그걸 놓친다면 좌파의 근거를 잃는 것이다.

제헌헌법을 주도적으로 만든 ‘중도주의 지식들’, 즉 김규식, 안재홍, 손진태 등은 일제 강점기 시대 ‘비파협적 민족주의자’들이다. 그들 사고는 좌익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최좌익(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면서 이념적 무장을 한 것이다. 그들의 분석은 국가가 아니고, 사회였다. 마르크스와 같은 행동양식이다.

마르크스의 시장의 현상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은 경제적 콘텍스트(economic context)에 관련하여, 가장 현저하고, 적절한 것에 분석을 중심 의제로 삼았다. 그것은 최고의 과학적 창의성(fecundity)의 원리에 분석이 집중되어 있다. 즉,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잉어가치’와 착취의 현실을 찾아낸 것이다.

중앙일보 고정애 논설위원(2022.05.13), 〈윤 대통령의 독특했던 취임사〉, “..전임 대통령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가 한 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달랐다. 3450자 분량 중 ‘자유’를 35차례 언급하고 '통합'은 한 번도 안 했다는 것 이상이다. (열린민족주의 사고이다). 우선 청자(聽者)가 세계로 확대됐다. 민족주의·국가주의적 색채는 대단히 희석됐다. 대표적인 게 ‘민족’의 부재다. “민족주의적 감성과 집단 무의식은 한국인에게 마음의 습관”(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이다. 윤 대통령은 이를 동원하지 않았다. 정말이다. YS(김영삼)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선 언급하지 않았으나 평양에서 “남쪽 대통령”이라며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대통령부터 자신이 민족의 지도자인지,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인지 분간을 못한다”(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질타가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에서 대신 ‘시민’이 자리했다. 원래 “민주주의는 정부와 시민이라는 개념이 상응하는 정치체제”(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등)다. 불행히도 우리는 시민을 쓸 자리에 ‘국민’을 써 왔다. 대통령들도 그래서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사엔 시민이 전무했다(?). 문 전 대통령의 경우 한 번 등장하는데 (서울)시민 뉘앙스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다”고 했다. 헌법이 국민 일색이어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제헌 때부터 “국민은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겨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유진오)는 시각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시민'을 15차례 썼다. 시민의 부활이라고 할 만했다. 민주주의의 보편 가치인 자유, 더 나아가 인권·연대·박애까지 말했다“

586 운동권 세력은 시민에서 더 나가 시민사회, 시장사회로 가야 유물론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들은 마르크스 담론에서 이탈하고 있다. 그들은 지적 담론을 뿌리친 채 권력 맛에 도취되었다.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실장(05.13), 〈광우병의 추억? 탄핵의 손맛?〉, ‘촛불혁명’의 감성적 포퓰리즘 쪽으로 간 것이다. 그게 ‘탈지성주의’의 실체이다. “광우병 대란은 권력을 빼앗긴 좌파가 기획한 진영 전쟁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정치 투쟁이었지만 MB 정권은 ‘진실 게임’으로 대응하는 실수를 범했다. 과학적 사실만 알리면 끝날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괴담의 허구성이 드러나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국민 건강보다 경제 이익을 우선했다는 것, 소통 부족과 일방통행식 국정에 대한 분노라는 것을 MB 정부는 간과했다. 출범 초 얻어맞은 반정부 폭풍으로 MB 정부의 국정 동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자신감을 얻은 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9년 뒤 결국 보수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구권력 세력의 의식 세계엔 ‘광우병의 추억’과 ‘탄핵의 손맛’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탈지성주의’가 판을 친다. 동아일보 이기홍 대기자(05.13), 〈지지율 압도하는 혐오도… 文의 실패는 尹의 반면교사〉, “문 전 대통령의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은 강도 높은 혐오도와 동전의 양면이다. 지지자는 ‘사랑해요’ ‘최고 성군(聖君)’ 수준으로 떠받들고, 부정적 평가자는 ‘실망스럽다’ 정도가 아니라 혐오, 증오, ‘역대 최악’ 수준으로 싫어한다. 지지율이 높지만 부정평가의 강도와 질(質) 역시 높은 것이다. 지도자라면 40% 지지율에 도취될 게 아니라 국민을 이렇게 양극단으로 갈라놓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해야 한다. 철저한 진영정치, 편 가르기 통치는 그에 상응해 증오도를 상승시켰고, 그 증오는 50% 후반대의 압도적 정권교체 여론이 확고하게 유지된 핵심 에너지가 됐다. 진보 장기집권 호기를 문 전 대통령 스스로 망쳐버린 것이다. 이런 참담한 실패에서도 배운 게 없는 듯 더불어민주당은 지지층만을 겨냥한 독주에 오히려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입법폭주로 인해 법치주의는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 자기 필요에 따라 법을 뚝딱 만들어 버리니 법은 그저 ‘내 마음대로’를 실현할 도구 신세가 됐다.”

586 운동권은 시장에서 관계 분석은 고사하고, 경제 현상도 분석하는데 실패했다. 매일경제신문 사설(05.13), 〈세수추계 2년간 114조 오류, 정부가 시장과 소통 못한 탓이다〉, “지난해 말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올 한 해 세금이 53조원이나 더 걷힐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61조원에 달하는 역대급 세수 오차가 발생한 데 이어 2년 연속 빚어진 초대형 세수추계 오류다. 지난해와 올해 초과세수를 합치면 114조원에 달한다. 이 정도면 정부 세수추계 자체가 엉터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국가의 수입인 세수가 한 해 얼마나 들어올지 추정하는 세수추계는 나라 곳간을 관리하는 기획재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이자 최우선 업무다. 세수추계가 정확해야 어디에 얼마만큼의 세금을 쓸지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다. 또 세수만으로 국가 지출을 다 충당할 수 없으면 적자국채를 발행해야 하는데 그 세수 규모를 잘 가늠해야 시장에 주는 충격도 줄일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세수추계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

엉터리 통계로 국민을 기만했다. 조선일보 사설(05.13), 〈5년 만에 ‘고용 분식’ 실토한 기재부, 다른 통계 왜곡도 바로잡아야〉, “통계청의 고용 통계에서 지난 4월 취업자 수가 1년 전보다 86만명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지만 기획재정부는 “(정부가 만든) 직접 일자리와 고령 취업자 비중이 너무 높다”고 밝혔다. 세금으로 대량 생산한 노인 알바 일자리가 대부분임을 실토한 것이다. 기재부는 “재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고도 했다. 문재인 정부 5년 내내 정권에 코드를 맞추며 마치 고용이 좋아진 듯이 강변하던 기재부가 정권이 바뀌고서야 진실을 말한다....통계 눈속임은 문 정부 내내 계속됐다. 일자리를 없앤 정부가 마치 ‘일자리를 늘린 정부’인 것처럼 국민을 속이는 일이 반복됐다. 가난한 계층이 더 가난해져 소득 격차가 더 벌어지고 민심이 나빠지자 정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통계청장을 바꿨다. 국가정책 수립의 기초가 되는 통계를 왜곡하는 것은 중대 범죄행위라는 비판 속에서도 문 정부의 통계 분식은 그치지 않았다. 엉터리 통계에서 엉터리 정책이 나오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586 운동권 세력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일부 포함한 미국 민주당만도 못한 군상들이다. 그들은 열린 좌파가 아니라, 닫힌 국수주의, 이성과 합리성을 결한 경제관을 가졌다. 한국 좌파는 반지성주의로 취급해도 싸다. 그들은 헌법 개정을 주장하면서, 제헌헌법 정신조차 숙독하지 않고 있었다. 담론 형성에 실패한 좌파의 군상들이다. 이념과 코드의 실체가 무엇인가?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원장(05.13), 〈새 정부 ‘포용적 무역정책’ 강구해야〉, “최근에는 무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의식해서인지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선진국에서는 ‘포용적 무역정책’의 중요성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포용적 무역정책’의 개념은 무역이론이 틀렸다기보다 무역의 혜택이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정책적 노력이 부족했다는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즉 무역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나아가 고조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포용적 무역정책’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포용적 무역정책’의 일환으로 ‘노동자 중심 무역정책(Worker-centric Trade Policy)’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은 자국이 맺는 무역협정에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포함시켰으며 중국 ‘위구르’ 지역에서의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무역상대국의 부당하고 불공정한 노동환경에서 생산된 상품이 미국으로 수입되는 것을 막아 자국의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무역활동 참여가 상대적으로 저조한 여성과 중소기업의 무역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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