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광조의 친필
▲ 조광조의 영정

 

 

 

 

 

 

 

 

 

 

 -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정암 조광조는 1482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은 조선의 개국공신이기도 했다. 그의 가계는 조선의 개국공신의 가문인 훈구 가문이었으나 김굉필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 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父兄)과 친척들로부터 세속과 어긋나게 행동하여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욕심은 꺾을 수가 없었다.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당시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조광조는 어린 소년이었으나 영특한 재능을 알아본 김굉필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김굉필과 사제지간이 된다.

그의 나이 14세 때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8세 때 아버지가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자 따라가 마침 평안도(平安道) 희천(熙川)에 귀양을 가 있는 김굉필을 처음 만났다는 설도 있다. 학문은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받들어 이를 토대로 하여 경전(經傳) 연구에 응용했으며,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옛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을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김굉필로부터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김종직의 제자이자 스승 김굉필의 친구들 중에는 남곤도 있었는데, 남곤은 후에 그를 공격하는 편에 서게 된다. 또한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대하되 의롭지 못한 자, 불의와 쉽게 타협하는 자들을 멀리하였고, 항상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려고 스스로 노력하였다. 이후 김굉필의 배소가 옮겨지게 되면서 그와 이별을 하고 김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로 사사된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이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이어 터진 직후라 김굉필의 제자이고 김종직의 말씀과 성리학에 빠진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기피하였으며,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며 조롱하거나 '화태'(禍胎, 화를 잉태한 이)라며 조롱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비난과 비아냥, 조롱에 굴하지 않고 성리학과 사물 연구에 정진하였다. 성리학에 몰두하게 되면서 친구들과도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행동을 절제하고 인내하려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그해 바로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 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파격 상소를 올려 화제가 된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그 이튿날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5]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던가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편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됐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하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종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5]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까지 양사에서 격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후 정암은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놓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5] 이후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된다.

1516년 3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바로 수찬이 되었으며, 그해 5월 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이조와 예조의 천거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이 되었다. 11월 29일 홍문관에서 계심잠을 지어올리자 왕명으로 좌찬성 김전·판서 남곤을 감독관으로 하여 특별 고과를 주관하자, 고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털요(毛褥) 1채를 상으로 받았다.

이후 5년만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는 고속승진을 거듭했다.[5]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이후 개혁을 꿈꾸던 중종의 특별한 총애가 있어 가능했다.[5]

1517년 2월 홍문관부교리, 경연시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正言), 호조, 예조, 공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그 뒤 다시 사간원정언·홍문관의 교리(敎理)·응교(應敎) 등을 거쳐 1517년 8월 전한이 되었다. 양사와 홍문관 등에서 언관으로 활동했다.

삼사의 언관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황해도 관찰사 윤세호는 그에게 아부하여 대사헌에 제수되기도 한다. 이후 조정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해 12월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는데, 과거 급제 후 30개월도 안돼 당상관으로 파격승진하였다. 그러나 의견이 곧고 인물의 옳고 그름을 철저히 가려, 개연히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변화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공경(公卿) 이하가 모두 그를 외경(畏敬)하기도 했고, 혹은 그를 미워하거나, 삼가 피하기를 원수처럼 하는 자도 나타났다.

1518년 1월 시강관을 거쳐 홍문관부제학, 경연참찬관이 되었다. 그 뒤 월과(月課)를 지어바치지 않아 추고받았다. 그해 5월 승정원 부승지가 되어,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후 승지(承旨)를 거쳐 부제학이 되어 성리학적 이념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규정,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 함으로써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동부승지를 거쳐 1518년 음력 1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다섯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수락하지 않았다.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임했는데, 당시 어진 선비들이 모두 뽑혀 요직에 앉은 때라 모두 협력하여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니 과거 성종 때의 법이 차츰 실행되기 시작했다. 성균관 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겸임하게 되자 성균관으로부터 성균관동지사직에서 해임하지 말 것을 청하기도 했다.

1519년 기묘년, 조광조를 밀어내고 권력을 잡게된 심정과 남곤 그리고 홍경주는 조광조를 살려두려 하지 않아서 중종은 결국 음력 12월 20일 능주(綾州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에 귀양을 간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이때 그의 동지인 김식, 김정 등도 연루되어 자결, 처형되었다.

그가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 용인에서 그를 만나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21세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가 유배되자, 유배지에도 글을 배우려고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양팽손 등의 지우들의 방문과 유배지에서의 학문 강의를 하던 중 음력 12월 20일 금부도사가 도착한다.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다.    
 

참고자료 : 인터넷판 위키백과
  

저작권자 © 안동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