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8일 화요일날에 우리 신문사로 기자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그래서 기자는 제보자에게 전화를 통하여 취재를 시작하였다. 내용인 즉, '훈민정음' 책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광산김씨(光山金氏) 긍구당 종손 김대중(金大中)씨는 진성이씨 회양당(晦養堂)의 거짓주장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원소장처는 광산김씨 긍구당이라는 주장하였다. 그리고 안동시청 소회의실에서 기자회견도 하였다고 했다. 현 국내의 어려운 시국과 같은 일이 원인이 인간의 이기적인 행태인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제보내용은 문제의 중심에 있는 '훈민정음 원소유자, 즉 원래 소유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또, 나의 소유인데 남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한다면 어느 사람이 가만히 있겠는가? 언론사는 공익적인 목적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역사를 분명하게 정립이 되어 후세에게 알려줘야 한다. 이것은 양인의 가치관 형성에도 밀접한 관계성이 있다. 우리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義)을 의라하고 불의(不義)는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정의이고 진실이다. 그래서 안동데일리는 보도를 하여야 하느냐의 선택에서 안동사회에서 분란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고민도 하였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을 거짓에 묻히고 선이 악에 지는 것은 용납이 안되는 일이라고 판단을 하고 독자들에게 언론사로서의 의무인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을 하였다. 제보자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보도를 줄 것을 부탁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 아     래 -

 - 저, 김대중(金大中)은 국보 70호『훈민정음』은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의 광산김씨 긍구당(肯構堂)이 1940년 초까지 원소장처였음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이『훈민정음』책자는 1938년 말에서 1940년 초에 저의 조부인 긍구당 종손 김응수(金應洙)의 사위 이용준(李容準:1916~2004 ?, 월북)님이 긍구당 서고에서 훈민정음을 유출하여 의도적으로 앞 2장을 새로 깁은 뒤에 1940년 초에 간송 전형필에게 매도하였습니다. (조선일보 1940년 7월 30일자 기사 참조)

[진성이씨 회양당(晦養堂)의 거짓 주장]

고모부 이용준님의 집안인 진성이씨 회양당에서는 이한걸(李漢杰, 이용준의 부친)님의 조상인 선산부사를 역임한 이정(李禎)공이 군공(軍功)이 있어 『훈민정음』을 세종임금에게서 직접 하사 받았고, 또 연산군의 언문탄압 때 앞 2장을 찢어서 없앤 뒤에 1940년까지 집안에 보관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이 진성이씨 회양당의 주장이 허구임을 아래 사실을 통해 증명합니다.

첫째는 ‘이정(李禎)공이 『훈민정음』을 세종임금에게서 직접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세종실록』에 따르면 1433년에 평안도 영변의 약산성(藥山城)을 수축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당시 군역(軍役)에 이정 공은 최윤덕 장군의 막료로 참여하여 군공으로 판관 벼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훈민정음』의 반포는 논공행상이 끝난 13년 뒤인 1446년이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또『훈민정음』을 그것도 군관(軍官)이며 막료(幕僚)에게 하사했다는 주장은 허구입니다.

둘째는 ‘연산군의 언문탄압 때 앞 2장을 찢어서 없앤 뒤에 1940년까지 집안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앞 2장은 세종대왕의 어제(御製) 서문이 있고, 또 정음의 발음 풀이 몇 자 외에는 모두가 한자(漢字)로 쓰여 있습니다. 한글 탄압에 한자가 쓰인 책장을 뜯었다는 이야긴데 이것도 허구입니다.

 위 내용분석에 따르면, 진성이씨 회양당에서 원소장처라는 2가지의 주장은 모두 허구이며 논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광산김씨 긍구당(肯構堂)의 주장]

저희 긍구당에서는『훈민정음』을 취득한 시기를 유일재 김언기(金彦璣:1520-1588) 선생과 장남 갈봉 김득연(金得硏:1555-1637), 차남 만취헌 김득숙(金得石肅::1561-1649) 당시에 소장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선조님들이 지은 가사인 지수정가(止水亭歌) 1편과 시조 63수가 집안에 전해 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훈민정음』이 발견될 당시에 원래 완전한 책자였지만, 표지와 앞 2장이 훼손된 이유를 밝힙니다.

① 우리 긍구당 서가에 있는 책에는 표지장에는 ‘肯構堂傳家寶’라는 장서기(藏書記)가 쓰여 있습니다.

② 『훈민정음』첫째 장에는 ‘光山后人’ ‘金致祥印’ ‘聖應家藏’이라는 장서인(藏書印)을 찍어 놓았습니다.

③ 『훈민정음』둘째 장에는 ‘天下太平春’이라는 입춘첩(立春帖)과 사돈지(査頓紙)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훼손한 이유는 장서기(藏書記)와 장서인(藏書印), 입춘첩(立春帖), 사돈지(査頓紙) 등 다양한 표식이 있어서 긍구당 소장이라는 증거를 없애려고 훼손했다고 봅니다.

[이용준님이 쓴 편지 12통이 긍구당(肯構堂)에 보관]

더욱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고모부 이용준님이 장인 김응수와 장모 송씨에 보낸 편지 12통이 긍구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매월당집』등 여러 서책이 유출되던 시기인 1939년과 1940년, 1941년에 이용준이 보낸 편지 내용 중에는 서책을 유출하는 수신처로 ‘관철정 257번지(貫鐵町二五七番地)’를 지목하거나, 책을 가지고 온 일에 대해 ‘범행자부대죄(犯行自負大罪)’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범행(犯行)이 대죄(大罪)이며 저지른 행위는 범죄(犯罪)였음을 시인하였고, 또 자신이 책을 가져간 일에 대해 ‘고속이서지례(古俗貽書之例:옛 풍속에 책을 주는 사례)’라는 표현을 쓰며 자신에게 책을 그냥 준 것인 양 하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훈민정음』의 원소장처는 광산김씨 긍구당(肯構堂)임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긍구당 김대중 종손은 아래와 같은 제목으로 덧 붙치며 기자에게 강변을 토했다.

[가슴을 치며 기자님께 애소합니다.]

제가 미욱하나마 어찌 없는 사실을 강변하겠습니까?

더욱이 그 당시 조부님의 음성이 아직도 제 귓전에 생생한 지금에 이 『훈민정음』의 원소장처를 진성이씨 회양당에서 기자회견까지 하며 거짓 주장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데, 제가 이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조상님을 뵐 올 면목이 없습니다.

여러 기자님의 현명한 판단으로 정론직필의 기사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긍구당 주인 金大中 올림.

<안동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일가들이 모여 사는 명가들의 집성촌이 많이 있다. 이 코너는 본래 목적은 안동의 명가를 소개하고 국민들에게 아직까지도 소중한 전통과 문화를 명자들을 통하여 진실과 진리 그리고 정신문화에 기대어 힐링을 하도록 마련되었다. 아쉽게도 취재를 하기전에 상기와 같은 제보가 있었고 첫 소식으로 안동의명가 소개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좋은 내용이라서 대단히 유감이다. 그러나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은 다시 단추를 풀고 제대로 끼우면 되는 것이다.

- 평소 기자가 생각한 오래된 안동의 발전에 병폐, 저해가 되는 요소는 일부 선비라 지칭하는 지도층의 이기주의의 발로라 생각한다. 흔히 안동에서는 권씨, 김씨가 다 해먹는다는 말이 나돈다. 속은 곪아도 겉만 괜찮으면 된다는 사고를 고쳐야 할 때이다.

독립투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민들이 현사태를 가장 잘 극복할 방법을 찾아 내어야 한다. 자신만의 사상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예를 들면 조선의 학자, 우암 송시열의 사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사대주의는 변화하는 국제정세나 적시의 사회개혁을 못한 나머지 국제적 고립이 되어 조선의 멸망을 가져왔다고 할 수가 있다.

안동의 고상한 정신문화도 좋은 쪽으로 변화가 와야 한다. 지킬 것은 지키고 개혁할 것은 과감하게 개혁을 하여야 한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 자처하는 안동은 이 시점에서 무엇을 반성하고 그렇다면 앞으로 어떠께 변화를 할 것인지를 지도층, 선비들이 앞장서서 할 때이다. 이 나라가 요즘 얼마나 혼란한가? 잘 못하다가는 나라가 멸망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신문사로 들어온 기사제보가 보고 기사화해서 훈민정음의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바르게 잡아야 한다고 판단된다. 이를 슬기롭게 이겨내어 좋은 기회로 삼아 안동사회의 병폐를 알리고 개선을 하였으면 하고 기대한다. - 본지 발행인 조충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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