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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기 박사] 2022년 새해, 생업(生業)에 프로정신을 갖자.

2022. 01. 01 by 조충열 기자

2022년 새해, 생업(生業)에 프로정신을 갖자.

▲조맹기 박사
▲조맹기 박사 / 前 서강대학교 교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국민 모두가 하시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임인(壬寅)년 새해 건강하시고, 삶을 직시하는 한해가 될 필요가 있다. 허위와 위선을 몰아내고, 자신의 생업(生業)에 정직성을 더해가는 한해를 꾸려 가시기 바랍니다. 2022년은 국민들은 심한 격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선이 있고, 지방선거가 있다. 정치에 휘둘리는 국민이 되지 말고, 민주공화국, 즉 만민공화(萬萬共和)의 정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 개개인은 국가의 주체로서 끝까지 자유와 독립 정신을 고수할 필요가 있게 된다.

전통적으로 호랑이는 위협과 공포〔虎患〕의 대상이다. 그러나 허위와 위선을 몰아내는, 즉 잡귀와 액운을 막아주는 신성한 영물(靈物)이 호랑이만한 것이 없다. 호랑이의 기상을 가지면, 나약한 자신을 채찍질 할 수 있다.

한국경제신문 고두현 논설위원(2021.12.31), 〈생업(生業)과 직업(職業)은 어떻게 다를까요〉, “벌써 12월 31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 짧으면서도 강렬한 시 ‘생업’을 배달합니다. 생(生)은 윤효 시인의 문학적 화두 중 하나입니다. 생이란 ‘생명’과 ‘목숨’의 비밀을 여는 열쇳말이죠. 나무로 치자면 가장 큰 가지, 풀꽃으로 치면 가장 실한 줄기가 곧 생입니다. 갑골문에서 ‘생(生)’은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날 생(生)이고, 낳을 산(産)입니다. 이 글자는 살 활(活)과 있을 존(存)의 뜻까지 아우르지요. 생업(生業)은 목숨 걸고 집중하는 일이 가운데 생업(生業)은 우리가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집중하는 일입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는 직업(職業)과 다르죠. 윤효 시인은 분초를 다투며 원단을 실어 나르는 시장통 오토바이 짐꾼들을 보면서 ‘생업’이라는 시를 썼습니다....생업을 위한 일은 가장 절박하고, 숭고하면서 거룩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1등인 것이지요. 자기 몸을 오토바이처럼 부릉부릉 달군 사람들의 생은 뜨겁습니다. 그 최선의 힘으로 일생을 완성하는 과정 또한 뜨겁지요.”

우리의 삶은 지난 5년 동안 혼줄을 놓고 살았다. 직업은 있는데, 생업의 절박함이 없었다. 국민 각자는 남의 해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 그 사이 건달 징치꾼이 국민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그것도 자유와 독립정신이 아니라, 5천만 국민의 기본권을 북한과 중공에 가져다 바쳤다.

그 추태는 연말 언론에 회자되는 공수처의 국민 사찰에서 그 정수를 알 수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국민의 생업에 끼어들어, 개인의 기본권을 빼앗아 갔다. 그게 문재인 청와대의 얼굴이었다. 대통령 후보 공약 1호가 이런 사기 짓이란다. 또한 우한〔武漢〕코로나19 정치방역에 전 국민은 청와대에 목숨을 맡기고 있었다. 그 사이 수많은 자영업자는 생업을 포기하기에 이러고, 이젠 코로나 지원금에 목을 맨다. 청년들은 지원금의 달콤함에 도취되어 있다. 매사에 수동적 심성을 가진 국민은 정치공학에 눈이 멀었다. 그 사이 국민 각자의 자유와 독립정신이 사라졌다.

국민들은 어떤 정치공학에 휘둘렸는가? 바른사회시민회의TV 박인환 대표(12.29)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 〇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빅 브라더가 모든 것 감시하고, 모든 걸 억압하고, 모든 걸 통제(타율적 통제), 〇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사람들에게 헷갈리는 많은 정보(쓰레기 정보)를 주고, 놀고 즐길 거리를 주면서, 스스로 압제를 환영하도록 만들어 통제(자율적 통제).”

그 결과는 참담하다. 국회, 법원, 행정부 그리고 밖에 있는 언론까지 한 패거리가 되어 국민의 기본권, 즉 생명, 자유, 재산을 난도질 했다. 극한투쟁을 하는 노조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직업의 의미를 가졌지만, 생업의 의미를 포기했다. 노동생산성이 올라갈 이유가 없다. 그들은 밀려오는 인공지능(AI)시대를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노동생산성이 바닥인데 올라가는 임금 감당할 기업도 없게 된다. 기업도 이젠 노조 때문에 R&D도 이전 시킨다고 한다. 귀족 노조가 폭력을 휘두르는 사이 공급망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 중소 중견 기업에 정치공학이 난무하니, 생업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정치는 정치판뿐만 아니라, 선거에도, 기업에도, 고등학교까지 침투한다. 그들의 선전, 선동술을 대단하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삶의 문턱까지 와 있다. 중앙SUNDAY 사설(01.01), 〈선거의 해 임인년(壬寅年), 통합과 치유의 계기 삼자〉, “2021년 새 아침이 밝았다. 희망을 노래해야 하지만, 그러기엔 눈앞의 현실이 험난하다.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 국가, BTS·오징어 게임 등 K컬처의 부상으로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3년째 접어든 코로나19 위기로 불안과 불만, 위기감이 팽배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은 전 국민을 시름에 빠뜨렸다. 여러 해 이어지고 있는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크게 보면 우리는 4대 위기와 마주했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사회에 대한 해법은 나오지 않았다. 양극화는 심해졌고 포퓰리즘의 도전은 어느 때보다 거세다. 미·중 전략 경쟁의 심화로 외교적 선택지가 고차방정식이 된 지 오래다.,,,(건달 정치꾼들이 생업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행위를 정치공학으로 풀어간다.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력은 정치의 증발을 낳았고 민주주의의 원리인 견제와 균형마저 무너뜨렸다. 검찰·공수처는 물론 사법부, 나아가 중앙선관위까지 정치적 중립 논란에 휩싸인 건 개탄스러운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중립적이고 공정한 선거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최근 예산은 물론 전기요금 인상까지도 대선을 염두에 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당적을 가진 장관들에게 선거관리를 맡기고, 무리한 종전선언을 추진 중이다. 과거엔 중립 시늉이라도 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외면한 듯해서 안타깝다.”

노동에도 인공지능이 들어오면서 생업의 개념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수동적으로 AI를 대하면 정치공학에서와 같이 인공지능(AI)의 노예가 된다. 그 개인에게 그 민족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 5천만 국민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인권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 기본권은 자신이 지키는 것이다. 생업을 통해서 각자가 기술의 진보에 따라, 판단력을 키워야 된다. 아니면 그의 삶은 송두리 채 날아간다.

중앙SUNDAY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01.01), 〈굿모닝 매트릭스〉. “빨간 약, 파란 약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까? 올해 우리 국민이 놓인 처지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갈등은 불가피하다. 선택해야 할 대상에 관한 정보가 충분치 않은 경우엔 더 그럴 수밖에 없다. ‘가짜 뉴스’까지 가세해 어지러운 형국인 듯하다.

1999년 매트릭스 1편이 개봉되었을 때, 인공지능(AI)이란 영화의 소재는 허황된 공상처럼 여겨졌다.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영화에서처럼 AI 시스템이 사람과 똑같이 보이는 ‘가공 인간’을 무수하게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AI가 ‘살인 로봇’이 되어 세계를 정복하는 상황까지는 지나친 망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AI 전문가 스튜어트 러셀 교수가 우려하듯, 여론 조작의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AI로 만들어진 수백만 개의 ‘가짜 신분’이 여론 조작을 하게끔 설정되어 수십억 개의 댓글과 ‘좋아요’를 쏟아내며 정보와 시장을 교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바탕에 깔린 ‘기계(AI)=악, 인간=선’이라는 설정 자체도 일종의 매트릭스로 보인다. 모든 일에 양면이 있듯이, AI에도 오용과 악용의 부작용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좋게 쓰일 수도 있지 않은가. 좋은 기계, 나쁜 기계가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기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수동적 개인에게 정치공학의 무방비 상태를 경험하는 것과 AI에 무방비적 노출이 되는 것과 다름 바가 없다. 지난 5년처럼 자신의 주권을 청와대에 일임하고, 그 주권을 가진 건달 정치꾼은 북한과 중공에 국민의 주권을 바쳤다. 그런 역사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생업(生業)에 프로정신이 필요하다. 생업에 치열한 국민은 주관적 평가의 잣대를 갖기 마련이다. 임인년에는 국민 각자의 치열하게 사는 생업의 시간을 기대한다. 더욱이 선거의 해일수록 국민들은 ‘정치 건달’이 정치권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업을 지킬 수 있는 선에서 민주공화주의 주인이 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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