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김영균 교수의 칼럼(대진대학교 공공인재법학과 교수) < 김영균 교수의 칼럼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안동데일리

상단영역

본문영역

김영균 교수의 칼럼

- 6. 25 남침의 진행과정(제1회) -

김영균 교수의 칼럼(대진대학교 공공인재법학과 교수)

2017. 10. 19 by 안동데일리 편집국
김영균 교수(대진대 공공인재법학과)
김영균 교수(대진대 공공인재법학과)

 

- 6. 25 남침의 진행과정(제1회) -

김영균 교수(대진대학교 공공인재법학과 )

○ 소련군의 남하와 38선 차단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기 몇일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대일전쟁에 참전을 선언한 후 8월 12일 청진에 상륙하고 계속하여 남하하였다. 이 때 미군은 유구열도(오끼나와)에 머무른 상태에 있었던 터라 소련군의 남하를 휴전선에서 차단하기 위하여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  소련군이 이외로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이로써 미국은 한반도에 발도 붙이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 한반도 북단에 진주하고 있는 소련군의 남하를 휴전선에서 차단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들은 미국이 소련에 휴전선 이북지역을 양보한 것이라면서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미•소 양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이 휴전선마저도 분단선으로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 내줘야 했을뻔 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하고 38선을 그엇다면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미•소 양국에 있다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미⦁소가 합의에 의하여 38선을 그은 것이 아니라 소련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책임이 있다면 외국군대의 주둔을 막을 수 없었던 한국의 무능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

○ 38이북지역의 공산화 진행

  38도선 이북을 선점한 소련군은 일본군, 일제경찰, 총독부 관리를 억류하고, 친일파를 제거한 다음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1945년 8월 19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각 시도에는 시 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나아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1946년 2월에는 각 지방의 인민 위원회를 총괄하는 중앙 권력 기구로서 사실상 정부 역할을 담당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출범하였는데, 김일성이 위원장이 되었다. 이에 앞선 1946년 1월 2일 북한은 朝鮮人民共和國 中央人民委員會라는 호칭을 사용하였고 1946년 3월 무상 몰수·무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1946. 3. 5),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으며(1946. 8. 28),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창설하는가 하면, 1948년 4월 29일 헌법을 채택하였다. 이로서 북한은 정당창설, 토지국유화 완성, 인민군 조직과 헌법까지 채택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 뒤늦은 미군의 진주와 남한정부수립

 1945년 9월 8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주둔하였다. 소련이 북한지역에 진주하여 공산당정부 수립에 착수한지 한달이나 지난뒤였다. 미군은 조선총독만을 파면하고 조선총독부의 행정기구와 조선인 관리는 그대로 인계받아 운영을 하였다. 북한지역에는 일본이 만주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아 공업화를 추진하였기에 고학력의 기술자들이 많았던 반면에, 남한은 농경지를 중심으로 식량공급기지로 이용하였던 터라 문맹율이 거의 90%를 상회하였다. 식민지 시대 일제관리를 제외하면 글을 읽고 해득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10%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미군정청이 식민지시대 관리를 그대로 인계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덕분에 이승만 정부와 남한은 친일파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승만은 북한의 김일성이 한반도에 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한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에서만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1948. 7. 17),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1948. 8. 15) 이미 헌법제정과 인민군창설까지 마친 북한보다 선수를 쳤다. 남북한 자유선거의 형태를 빌어 한반도 전체에 공산당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김일성으로서는 낭패를 보게되었다. 이승만 때문에 공산당 단독정부 수립이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 것이다. 이승만을 철천지 원수로 매도하고 친일파라고 뒤집어 씌우는 것은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촉발시키기에 가장 용이하기 때문이다.

○ 북한정부수립

 김일성은 1948년 8월 25일 이북지역에서 최고 인민 회의 선거를 실시하고 또한 1948년 9월 제1차 최고인민 회의를 개최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곧이어 9월 9일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만약에 이승만대통령이 선수를 쳐서 남한정부를 수립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는 피할 수가 없었다. 일사분란한 정당조직과 인민군 군대까지 갖춘 북한과 사분오열 쪼개진 남한이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면 누가 선거에서 승리할 것인가. 이승만대통령의 선수는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은 신의 한수였다. 북한이 이승만을 분단의 책임자로 매도하고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948 년 12월12일 유엔총회는 한국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1948년 12월 소련은 북한에서 철수하였다.

○ 김일성의 남침계획

 공산당에 의한 단일 정부수립에 실패한 김일성은 이를 만회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무력에 의한 남한의 정복이었고, 그 이론적 배경은 프로레타리아 폭력혁명론이었다. 1949 년 3월17일 김일성과 「조⦁소 문화협정 및 비밀 군사 협정」을 맺어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원조를 받는 협정을 체결하였고, 다음해인 1949 년 3월18일 「조․중공 비밀군사 협정」을 조인하여 남침시 재 중국 조선인부대(일명 팔로군부대)의 파견을 확보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자유총선거의 형태를 빌어 한반도 전체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지만, 그것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쟁에 의한 통일추진을 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9년 3월 모스코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여러 번 남침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허가를 거부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허가가 없으면 어떠한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는 김일성의 연설문조차 소련의 승인 없이는 발표할 수 없었다. 김일성의 공식적인 연설문은 북한 주재 소련관리가 파란색 펜으로 고친다음 모스크바로 보내서 모스크바의 허가가 떨어지면 연설문을 읽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꼭두각시, 괴뢰정부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1950년 1월과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여러차례 방문하여 남침을 허락해줄 것을 집요하게 간청하였다.

 ○ 미군철수와 에치슨 라인

당시 미국의 시각에서 국익의 가장 우선순위는 유럽이었고 2순위가 일본, 3순위가 필리핀이었다. 한반도는 안중에도 없었으며, 더군다나 1948년 12월 소련군이 북한지역에서 철수함에 따라 한반도에 주둔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에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 지역방위선이 알류샨 열도∼일본 오키나와(沖繩)∼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밝혔다.  소위 에치슨라인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이 한반도에 전쟁을 유발하기 위하여 위장철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에 전쟁을 유발하기 위하여 미군을 철수한 것은 한반도에 전략적인 중요성이 없다고 오판한 때문이지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에치슨 선언에 따라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는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을 철수하였다. 그 당시에 미국은 소련과 중국에 의한 공산세력의 확산에 대한 경계심이 희박하였다. 미국이 공산세력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끼고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가 공산세력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김일성에 의한 남침이었다.

○ 6. 25 남침

 미군철수에 고무된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는 김일성의 간청을 받아들여 50년 3월 30일 마침내 남침을 허락하였다. 북한은 1949 년 7월 중순 18~22 세까지의 청소년을 강제 입영시키고, 1950 년 6월17일 부 터 18일 까지 90%의 병력을 휴전선으로 이동 배치시켰다. 모든 병사들은 6월 24일 19:00까지 저녁식사를 종료하고 23:00까지 공격선에 도착하여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마침내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포사격을 신호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소련의 후원을 받은 김일성 괴뢰가 이렇게 소련의 전쟁을 대리하는 동안 남한은 전쟁준비는커녕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할정도로 가난하였다. 더군다나 미군마저도 한반도를 외면하고 떠나버렸다. 미국의 전쟁대리인은커녕 방어선에서 제외된 미국과 무관한 나라였다. 김일성의 남침으로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뒤늦게 깨닳은 미국이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할때까지 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김일성의 군화에 밟히고 있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는 유엔군을 포함한 아군의 사망자 182,775명,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군 1,420,000명, 민간인 373,599명의 사망자를 낸 인류역사상 유래를 볼 수 없는 동족간 유혈극이 김일성 한 사람에 의하여 이렇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 추종자에 의하여 여전히 김일성은 추앙되고, '주사파'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행세를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