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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에 분개한다." - 압구정에 위치한 한양회관서,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 대책위원회 일동, '동아일보와 언론중재위'에 반박보도 요구해... - "조가 가문은 분개하고, 앞으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 결의"

성명서 - '동아일보 인터넷 판 김순덕의 도발'서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 대책위원회 일동

2020. 04. 05 by 조충열 기자
▲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 대책위원회 일동. 사진 왼쪽부터 충열, 희영, 종구, 맹기, 대용 / 압구정동에 위치한 한양회관 6층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동데일리 서울=조충열 기자) 지난달 민변출신의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은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후보가 '정암 선생'에 대한 망언에 이어 동아일보는 『김순덕의 도발』에서 '조국·조광조가 개혁을 했다고?'라는 제목의 칼럼에 대해 지식인이라는 인사와 언론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정암 선생과 그 후손인 35만 종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등 한양조씨 종인들이 뿔이 났다.

한양조씨대종회(회장 조호원)는 사무실로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밝혔다. 그리고 문제가 된 인사와 언론사는 성명서와 전화를 통해 즉각적으로 반박을 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일(목), 정암 조광조 폄하 대책위원회가 발족되고 한양조씨 병참공파 종친회가 위치한 압구정동 '한양회관'에서 긴급 회의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해 그냥 넘어갈 것이 아니다"라는데 뜻을 모으고 "동아일보사와 언론중재위원회에 각각 진정어린 사과와 함께 반론보도를 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동아일보와 언론중재위원회에 보낼 문서를 작성했다. 

긴급히 구성된 대책위원회 조대용 고문은 "이번 기회에 종친의 뜻을 모아 결속을 다지고 정암 선생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희영 전 고려대 교수는 "이번 기회를 통해 35만 한양 조씨를 대표하는 대종회와 집안에서는 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 "집안 내의 역사기록을 좀 더 세심하게 관리하고 후손들에게 교육에도 신경써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또, 조맹기 서강대 명예교수도 "역사에 대한 잘못된 교육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이참에 산재한 우리 가문과 관련있는 역사 사료와 문집 등의 효과적 활용방안도 강구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래는 동아일보사와 언론중재위원회에 보낸 항의서이자 성명서 내용이다.

< 성명서 > -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 대책위원회 일동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에 분개한다.

정암 조광조(1501년~1519년)
▲ 정암 조광조(1501년~1519년)

개혁 인물로 정치 제물이 되었던 정암 조광조가 4·15 총선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등장했다.

황희석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이며,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 재등장시킨 것이다. 그 이틀 후(2020년 3월 24일) 약속이나 한 듯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는 정암을 반개혁 인사로 폄하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35만 한양 조가(趙家)의 문중에 정중히 사과하고, 그런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근신해야 한다. 만약 이 엄중한 사실을 묵살하고 계속 ‘사자 명예훼손’을 자행하면, 한양조씨대총회는 모든 합법 수단을 강구할 것임을 본인들에게 알린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 14년(1519년 12월) 기묘사화의 희생 제물로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그는 전라도 능주(지금의 화순)에 유배되어 중종이 내린 사약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는 “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 白日任下土 昭昭照丹衷(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밝은 해가 위에서 굽어보노니 나의 충심을 환히 비춰주리라.)”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37세 나이로 요절을 했다.

그 후 정암은 조선의 동방 5(賢)으로 성균관 문묘와 전국 향교에 배향되어 유림들의 추앙을 받았다. 정암은 정치적 민감한 문제를 당면할 때 성리학의 이념을 우선시했고, 끝까지 도덕적 순수성을 간직했었다.

정암은 조선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 손으로 아버지는 조원강(趙元綱)으로 사림의 선각자 김굉필(金宏弼)을 스승으로 모셨다. 정암의 아버지는 감찰(監察. 정6품), 즉 사헌부의 하부 기관으로 제도권 언론에 발을 디뎠다. 정암 또한 제도권 언론 3사(司) 사간원 정언(정6품)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중종 10년 8월 22일 알성시에서 장원급제로 수순에 따라 정언으로 발탁이 되었다. 그 40개월 후 중종 13년 11월 종2품의 대사헌으로 발탁이 되어, 1년 간 봉직했다. 조선 제도권 언론이 수장이 된 것이다. 당시 사헌부는 논집시정(論執時政), 교정풍속(矯正風俗), 규찰탄핵(糾察彈劾) 등이 주요 업무였지만, 풍속을 바로잡는 주요 기관이다. 사헌부는 현대 언론기관, 검찰청 등의 기능을 했다. 그리고 사헌부는 국가 업무를 집행하거나, 인사정책을 총괄하는 실무부서도 아니었다. 더욱이 현재 법무부 같은 검찰의 인사를 담당하는 곳은 전혀 아니다. 사헌부 관원이라야 6명, 각도의 감찰 3명씩(계 30명) 있었을 뿐이었다.

한편 연산군은 무오·갑자 사회를 일으키고, 중종이 등극한 나라는 거덜나있는 상태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3년 전 일이다. 세조, 성종이 탄탄하게 닦아놓은 조선의 이념적 기반은 연산군의 11년 8개월 동안 왕조는 연명이 어려울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시대의 절박함을 절감하고, 반정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중종은 사림(士林)을 등장시켜 조선의 유신을 단행코자 했다. 그 구원 투수로 제도권 언론의 수장으로 정암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 자리에 누가 대사헌으로 임명되어도 시대의 희생물이 됨이 뻔한 일이었다. 중종은 개국 공신의 후손으로 학문적으로 원숙하고, 육체를 단련시키고, 말발이 좋은 젊은 정암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앞일을 예측할 수 있었던 정암은 그 잔을 피하고 싶었다. 정암은 그날 5번 왕에게 대사헌 임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다. 중종은 끝까지 정암의 청을 거절했다.

정두희 서강대 전 명예교수는 정암을 평하면서 “말을 바르고 하고, 행동이 경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한 다음 담력 있게 밀어붙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라고 했다.

언로를 개방하여, 유림의 청음(淸音)이 묘당(廟堂)을 강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경세론(經世論)를 성리학의 원론에 가깝게 풀이했다. 여기에 경(經)은 요순시대의 정치를 원형으로 했고, 공자와 맹자 정신에 충실토록 한 것이다.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정풍운동을 제시했다. 그는 도학정치(道學政治)로 윤리, 도덕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는 이성과 합리성을 찾는 기본이다. 성서의 에덴동산은 선악의 구분으로 낙원과 실낙원을 갈랐다. 그게 다름 아닌 우리의 헌법 정신인 자연법사상이다.

정암은 격물치지(格物致知)로 각자(各者)의 소양 그리고 모든 물건이 그 근본이 있으니, 그 근본대로 궁구하고, 그 이치를 삶에 적용시키도록 했다. 현대의 과학 정신이 격물치지에서 출현된다. 제도권 언론의 수장으로써 정암은 조정과 백성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삶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공자의 주경야독(晝耕夜讀) 정신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가와 후세인들은 그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역사만 기록하게 마련이다. 승자의 역사를 정암의 모든 것으로 언급한다.

식견으로 조국(曺國) 전 법무장관과 비교하고, 4·15 총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정암을 등장시켰다. 또한 김순덕 대기자는 성리학 이념의 잣대를 무시한 채, 사회정책론으로만 정암을 폄하했다.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가짜 뉴스의 정신을 다시 현실 정치에 끌고 와 정암을 부관참시할 태세이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조가 가문은 분개하고, 앞으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을 결의한다.

2020년 4월 4일

정암 조광조 폄하 사건 대책위원회 일동(충열, 희영, 종구, 맹기, 대용)
한양조씨대종회(회장 조호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가길 28, 광화문플래티넘 6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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