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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2019년 1월 25일 금요일 오후3시~5시 장소: 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 제4차 -안동 편- '주제: 이승만, 조선의 마지막 위인'

2019. 01. 26 by 조충열 기자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강연회 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강연회(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안동편(안동시청 낙동홀)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제4차 안동 편, 이영훈 교장선생님의 강연회가 주익종 이사의 사회로 25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안동시청 낙동홀에서 140여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진지한 강연회가 개최됐다.

이날 김광림 의원(자유한국당, 안동시)은 참석은 못했지만 축전을 통해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회 제4회 안동강연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뜻 깊은 행사를 보수의 성지 안동에서 개최하여 주신 것에 이승만학당 이영훈 교장선생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인사를 전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헌을 하신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제대로 알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대한민국의 올바른 건국사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항상 행운과 건강이 가득하길 기원한다"고 인사말을 전해 왔다.

그리고 박원갑 경상북도향교재단 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이번 강연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이야말로 '국가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계신분들"이라면서 "시간을 내어 강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고맙다"고 화두들 던졌다. 특히 "안동은 나라가 어려울때마다 앞장서서 지킨 곳이고 대표적인 고장이고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말했다. 또, 안동은 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 안동이라고 말하며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지금이 바로 안동의 '선비정신'이 발휘될 때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많았지만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박정희 경제대통령이 두 분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 청중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돈을 퍼 주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 손자 손녀들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과 "잘 살아야 된다"고 덧 붙였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골목상권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안동의 시장상권에서 죽는다는 말들이 많이 들린다고 말했다. 나라를 구하는데 안동이 먼저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뜻과 마음을 뭉쳐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이영훈 교장 선생님의 강연을 잘 들으시고 주변에 알리고 계몽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을 마무리했다. 

바로 이어 이영훈 교장선생님을 주익종 이사가 소개를 하고 곧바로 강연회가 이어졌다. 이 교장선생님은 이승만학당은 2년 6개월이 되었다고 말하며 설립하게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이승만학당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이념과 업적을 연구하고 또,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하는 기관'이라고 밝혔다. 조금전에 박원갑 경북향교재단 이사장과 나눈 환담부터 말하겠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20~30년뒤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어있을까"하는 질문부터 이야기를 하겠다고 밝혔다. 희망하기에는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6~7만불로 세계 10대 순위안에 드는 선진국으로 경제적·정치적으로 풍요해져 있고 민주주의가 대단히 발달해 있고 시민교양이 성숙해 있고 남북한이 통일돼어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를 리더하는 선진국으로 발전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 교장선생님은 회이(懷疑)적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이승만학당 정광제 이사는 "각 지역에 분교를 운영할 것"이라면서 "안동지역의 강의를 하기 위해선 30명의 수강생이 있다면 개설이 가능하겠다"고 말하며 많은 신청을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는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선생님의 강연자료이다.

이승만학당 전국순회강연 제4차 안동지역 2019125

이승만, 조선의 마지막 위인 - 이영훈(이승만학당 교장)

조선왕조는 유교(儒敎)의 이념과 윤리로 통합된 국가입니다. 그 시대가 남긴 유교 문화는 오늘날에도 면면히 계승되어 우리 한국인의 시회·국가 생활을 이끄는 귀중한 유산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근로하고 저축하고 성취하려는 힌국인의 생활 자세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입니다.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국민 하나하나의 일상생활에 베인 높은 수준의 근로 규범과 성취 지향 덕분입니다. 그것들 모두가 조선왕조 500년의 유교 정치, 경제, 문화가 남긴 역사적 유산입니다.

조선왕조의 유교 정치와 문화는 많은 위인을 배출했습니다. 그 대표적 한 분이 선조(宣祖)의 배향 공신인 퇴계(退溪) 이항(李滉)입니다. 동양 유교 철학의 역사에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은 인간 세상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생성과 운동의 원리로서 이(), 곧 근본 도덕률의 능동적 작용을 유난히도 강조하였습니다. 그 조선성리학이 바로 퇴계 선생에 의해 성립되었습니다. 퇴계 선생의 훈도를 받아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일원은 우수한 성리학자를 수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안동 일원은 지금도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깊숙이 규정하는 유교 문화의 연수(淵藪)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유교 정치와 문화가 배출한 여러 위인을 숭모함에 있어서 우리가 늘 잊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선왕조의 위인으로서 세종대왕 충무공, 퇴계, 이이, 서애, 학봉, 다산 등 여러 정치가와 학자틀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태어나 동양의 고전과 조선의 성리학을 공부하고, 그 온축(蘊蓄) 위에서 서양의 계몽사상과 신학문을 연마하여 왕조의 패망과 더불어 갈 길을 몰라 헤맨 이 민족에게 개인의 근본적 자유라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 그 바탕에서 끝내 자유인의 공화국으로서 이 나라 대한민국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던 또 한 분의 위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잊어왔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건국 대통렁 이승만(李承晚, 1875-1965)입니다.

이승만이 있어서 조선왕조는 대한민국과 연속적인 정치사로 설명이 됩니다. 이승만이 있어서 조선의 유교 문화는 대한민국의 현대문화가 계승 관계로 해명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들 18~19세기 조선후기에 성립한 근대사상의 태동으로서 기호인(畿湖人)이 중심이 된 실학(實學)이란 학풍을 거론합니다. 반계(磻溪), 성호(星湖), 연암{燕巖), 다산(茶山), 추사(秋史), 환재(桓齋)로 이어진 실학 전통의 마지막 계승자가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이 서재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실학 연구는 그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립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그 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국가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김일성이 세운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끝내 김씨 세습왕조로 전락하고 말았을 그 길을 걸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은 자유인의 공학국으로 세워졌습니다. 건국 이후 40년간 정부 형태를 둘러싸고, 또는 대통령의 선출 방식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근본적 자유가 부정된 적은 없습니다. 헌법이 정한 기한에 따라 국민의 선량(選良)을 뽑는 선거가 취소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제도가 살아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누가 세웠습니까. 다름 아닌 우리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정치가와 국민은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심하게 왜곡하거나 부당하게 폄훼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나라의 역사의식과 정신문화가 이래서야 과연 이 나라의 장래가 밝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양녕대군(讓寧大君)16세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나이 2세에 서울 남대문 밖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至德祠)가 있는 도동{桃洞, 복사골)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우제(雩祭)를 드린 제단 남쪽의 동네였습니다. 그 연유로 이승만은 자신의 호를 우남(雩南)으로 했습니다. 출생과 성장의 배경에서 이승만은 조선 제1급의 양반 신분에 속하였습니다. 총명한 이승만은 나이 12세부터 과거에 응시했습니다만, 급제의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인생의 목표를 상실한 이승만은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습니다. 영어라도 배우면 정부에 쓰임새가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습니다. 거기서의 수학 2년간 이승만은 영어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자유민주 정치철학을 배웠습니다.

배제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의 일간지를 창간하는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최초의 신체시(新體詩)를 짓는 문학가이기도 했습니다. 1898년에는 만민공도회(萬民共同會)를 이끈 열혈 청년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러다가 1899년 혈기가 왕성한 나머지 고종(高宗) 황제의 폐위 음모에 연루된 중죄인의 몸으로 한성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57개월의 영어(囹圄)에서 이승만은 권력가의 비호로, 간수장의 호의로, 선교사의 도움으로 학업에 매진합니다. 그 기간에 이승만은 서유럽의 역사와 철학에 정통한 지식인으로 거듭났습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까지 개인의 자유가 인간사회를 행복과 평화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신봉하는 종교인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19042월 러일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이 끝이 나면 대한제국은 어느 쪽이든 이긴 나라의 먹이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감옥 속의 이승만은 분연히 붓을 들고 미친 듯이 써 내려갔습니다. 바로 독립정신이란 책이있습니다. 이 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다름 아니라 독립의 정신을, 곧 자유의 정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독립이란 무엇인가. 혼자서 남의 속박을 받지 않고 문호를 걸어 잠그고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독립이 아니다. ‘자유와 독립은 바깥 세상과 개방하고 통상하고 경쟁하는 가운데 근로하고 저축하는 삶의 환경과 자세이다. 그래서 문명이 개화하고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를 누리는 것이 자유와 독립이다. 청년 이승만은 어느덧 당대 세계 수준의 지성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해 8일 감옥을 나온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 대신의 명을 받아 미국 하원의장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탄원하는 밀사로 미국에 파견됩니다. 이승만은 19058월에는 미국 데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면담하는 활약상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을 승인하는 협약을 일본과 체결한 상태였습니다. 밀사 사명을 완수한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뒤이어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910년의 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의 박사였습니다. 미국에서 이승만 다음의 박사학위는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배출되었습니다.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은 참으로 우수하였습니다. 1912년 프린스턴대학은 그의 학위논문을 동 대학의 출판부에서 출간하였습니다. 이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영예가 아니였습니다.

이승만의 학문은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임마누엘 칸트로 이어진 영국 계몽주의에 기초하였습니다. 그는 최초의 자유인의 공화국미국의 철학과 역사에 정통하였습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그의 영혼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한평생 그의 동포가 미국인과 같은 자유인으로 거듭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는 한평생 그의 조국이 미국과 같은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소생하기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정신세계는 끝까지 그를 훈육한 조선의 유교 문화에 깊이 뿌리를 박았습니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이승만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의 서두에서 의()를 추구하다 죽은 죽음이 결국 천추에 빛나는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이치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망해가는 나라의 선비가 마땅히 추구할 삶의 자세를 그렇게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유교적인 사생관(死生觀)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12년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효(忠孝)에 바탕을 둔 우리의 우수한 정신문화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승만은 유교 문화의 온축 위에서 서양의 신학문을 연마한, 결국 우리의 전통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하고 계승한, 그리하여 조선왕조가 마지막으로 배출한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100년 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은 각지에서 성립한 여러 임시정부에서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무렵 이승만은 누구도 그와 겨루기 힘들 정도의 큰 위망(戚望)을 그의 동포로부터 입고 있었습니다. 해내외의 한국인은 간간이 듣는 이승만의 소식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40년을 견딘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연상하였습니다. 하늘이 내린 역사가 부여한 그 위망을 자산으로 하여 이승만이 벌인 독립 투쟁과 건국 이후 이룩한 나라 만들기의 업적을 소개하는 것은 시간 관계상 별도의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발견된 이승만이 지은 한시(漢詩) 한 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1903년경 한성감옥에서 지은, 선비의 고단한 심경을 표현한, 격조 높은 칠언율시(七言律詩)입니다.

朝擬青山寄此身 일찌기 청산에 이 몸을 맡기려 했는데

如何誤落溷花春 어찌하여 혼탁한 세상에 잘못 떨어졌는가

久遊自足窮途客 오랫동안 궁색한 나그네 신세에 자족했거니

奇遇無非失路人 만나는 이마다 길을 잃은 자 아님이 없네

滿架圖書堪慰僻 서가 가득히 담긴 책이 궁벽한 처지에 위로가 되는데

半窓風月可饒矣 반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달이 넉넉하구나

勸君莫謾誇懷玉 그대에 권하노니 품은 옥을 자랑하지 말라

不琢誰 ? 辨假眞 쪼지 않으면 누가 가짜이고 진짜인지를 분별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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