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공영노동조합 성명서(2020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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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세 權力 최강욱 씨가 言論改革을 논할 수 있나?"
"그에게 필요한 건 언론의 權力 감시가 아닐까?"

며칠 前 방송됐던 <저널리즘 토크쇼 J>가 세간에 큰 화제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당선인 (前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을 출연시킨데다 그의 발언들이 부적절 시비를 낳으면서 주요 일간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제작진의 제작가이드라인 미준수 의혹과 심의 규정상 여러가지 문제점들도 지적받고 있다.

‘프로그램 만들다 보면 실수할 수 있다’
김태선 국장, 정창준 부장, 김양순 팀장은 진정성 갖고 비판에 임해야

우리는 먼저 모든 제작진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보면 때로는 ‘실수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런 실수들이 쌓이고 쌓여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발현되고 시청자를 감동시키는 프로그램으로 구현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 취지에서 이번 프로그램에 최강욱 씨를 출연시키는 결정권을 갖고 <저널리즘 토크쇼 J>  제작에 관여한 김태선 시사제작국장 (5월 12일자 심의부 발령), 정창준 부장 (5월 12일자 뉴스제작1부장 발령)과 김양순 팀장 등 제작진 일동은 진정성을 갖고 이 성명서를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언론의 소명이란 다양한 여론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

言論이란 뭔가? 세상에 일어난 일들을 전달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세상에 일어난 일들을 보는 관점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소리도 다양하다. 여기서 言論의 自由라는 게 왜 필요할까? 사람들의 견해가 다양하고 목소리가 다양하기 때문이 아닐까? 언론과 관련된 여러 가지 가치 가치들이 있겠지만 언론의 자유라는 게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言論自由는 다원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초석

言論自由는 또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의 하나다. 세상의 99.9%가 A라고 말해도 0.1%는 B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절대권력을 견제할 수 있고, 다수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 그 누군가의 갑질도 막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류의 천부 人權도 보장이 되는 것이다.

言論自由의 근간을 이루는 속성은 그래서 바로 다원성이다. 서로의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틀렸을 가능성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너는 틀리고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순간 공존은 어려워진다.

이제 김태선 국장, 정창준 부장과 김양순 팀장이 최강욱 당선인을 앞세워 강조하려 한 가치가 ‘言論改革’이었다면 그 실행 주체에 대해서 한번 논해보자. 

言論改革의 실행주체와 훼방꾼은 서로 다른 운명일 뿐

言論改革의 실행주체는 누구여야 할까?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훼방꾼은 누구일까? 언론을 근본적으로 언론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론의 가장 큰 사명은 뭘까?  견제와 균형이 튼튼해야 건실한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이를 위해선 언론의 권력 감시가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게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떤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 인류는 역사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극우 히틀러의 민족관찰자(독일 나치스 기관지), 극좌 스탈린의 프라우다, 극좌 모택동의 인민일보, 극좌 김일성의 노동신문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언론개혁의 실행주체가 누구인지? 이를 막는 훼방꾼은 누구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言論自由를 통제하려는 것이 실세 權力의 속성
실세 권력은 그래서 言論改革의 주체로 부적절하지 않을까
 

權力은 근원적으로 다양한 여론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언론자유의 대척점에 서게 되는 속성을 지닌다.  권력자는 언론자유를 태생적으로 거부하게끔 되어 있다.  장기집권을 누리고 있는 러시아의 ‘푸틴’을 보라. 귀에 거슬리는 질문을 한다고 기자회견장을 박차고 나가는 미국의 ‘트럼프’를 보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신고한다고 유언비어 유포죄로 현직 의사를 감옥 보낸  중국의 ‘시진핑’을 보라. 북한의 ‘김정은’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결론 하나가 도출된다. 言論改革이라는 명제는 權力이 개입해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言論改革의 주체는 당대 권력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언론개혁의 주체는 언론사의 기층 종사자와 NGO 등 조직화된 네트워크의 힘으로 이뤄내야 한다는 당위성이 성립한다. 그 결과 자유주의 언론관을 향유하는 국가에서는 시민적인 힘에 의한 언론개혁이라는 명제가 토론 가능해지는 것이다. 반면 전체주의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언론관이 지배하는 공산국가에선 언론개혁이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곳에선 언론이란 없고 매체가 선전선동부의 하부 행동대원일 뿐이어서 그렇다. 중국의 CCTV, 인민일보나 북한의 로동신문을 언론이 아니라 매체로 통칭하는 이유다.

실세권력 최강욱 씨가 언론개혁 주체가 될 수 있나 
‘최강 스피커’ 달아준 언론의 자화상 부끄럽지 않은가 

자 이제 최강욱 씨 건으로 돌아가 보자.  최강욱 씨는 그럼 뭔가? 그는 당대 실세 권력의 상징이다. 문재인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 출신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국 씨와 함께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범 여권인 열린민주당 당선인으로 당 대표로 선출됐다. 확실한 당대 실세 권력자다. 그런 최강욱 씨가 언론개혁을 논할 수 있는가? 그에겐 언론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거칠게 표현해 히틀러가 언론개혁을 외치고 스탈린이 언론개혁 하자는 것과 뭐가 다를까?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형광등 100개 아우라 드립 친 TV조선과 최강욱 씨에게 언론개혁 ‘최강 스피커’라면서 별을 반짝거리게 한 <저널리즘 토크쇼 J>는 뭐가 다른가를 자문해보자.

힘 있는 실세 권력의 소리만 전달한다면
그건 언론이 아니라 선전선동부 기관지나 찌라시로 전락해

공영방송 종사자는 힘들지만 외롭고 옳은 길을 걸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당대 권력의 실력자가 ‘언론개혁’을 외친다고  같이 부화뇌동한다면 그건 언론인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특정 정파의 관점만 계속해서 반영한다면 그건 이미 언론이 아니다. 그 정파의 기관지이거나 선동 ‘찌라시’가 아닐까? 그럴 경우 그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당대 실세 권력의 앞잡이 소리를 듣지 않을까? KBS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전두환 장군 류의 ‘땡전’ 뉴스 등 정권 옹위 부대라는 처참한 비판을 받았던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이런 일이 재발하진 않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역사는 반복한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좌파시민단체의 관점만을, 그것도 실세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출연자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마음껏 일방적인 관점을 떠들도록 보장해줘 놓고선 이제 와서 자신들은 개입 안했다느니 해봐야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이젠 더 이상 그런 부적절한 짓을 되풀이해선 안된다.

마지막으로 <저널리즘 토크쇼 J> 제작진의 노고와 수고에 감사드리며 김태선 국장, 정창준 부장, 김양순 팀장에게도 다시 한번 진정성 있는 성찰의 모습을 기대한다.

2020년 5월 13일
KBS공영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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