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 강석우(경상북도예절원장)
인동 강석우(경상북도예절원장)

 

(제6회) 《우리나라 예절나라》 

【큰 명절과 세시풍속(歲時風俗)】

『설날』

〔날짜〕 설은 음력으로 1월 1일이다. 그해의 첫날이라는 뜻에서 한문으로는 원일(元日)이라 하고 설날 아침을 원조ㆍ원단(元朝ㆍ元旦)이라 하며, 가정의례에서는 정조(正朝)라 한다. 옛날에는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冬至)날을 설날로 했었다.

〔설날 명칭과 유래〕 설날의 명칭과 유래는 확실한 정설은 없으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해의 첫 날이라 낯이 설어 설날이라 했다는 이야기와 나이 먹기가 서러워 설날이라 한다고 전한다. 봄이 시작하는 날을 봄이 선다는 뜻으로 입춘(立春)이라 말하고, 가을의 시작을 입추(立秋)라 하듯이 이처럼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라 해가 서는 날(立歲日)이라는 뜻으로 설날이라 한 것이라 믿어진다.

〔차례(茶禮)〕 설은 크게 차례(茶禮)와 세배(歲拜)로 상징되는데 자기 집에서 기제사를 지내는 모든 조상에게 설날 음식을 올리고 새해 인사를 하는 것을 차례라 한다. 조상에 대한 차례와 어르신께 드리는 세배는 우리 고유의 미풍이다.

〔세배(歲拜)〕 설날 아침 집안어른이나 동네어른 또는 선생님, 선배에게 새해 인사의 절을 한다. 설날 인사를 덕담(德談)을 한다고 하는데 덕담은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새해에 이루어야 할 일을 긍정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또 세뱃돈은 아이들이 세배를 하면 칭찬하는 의미로 용돈울 주는데 ‘세뱃돈’이라 하는데 절 배우는 아이들에게 칭찬하기 위해 주는 것이다.

〔떡국(湯餠)〕 시절음식은 떡국인데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에 놓고 떡메로 쳐서 가래떡을 만들고 엷게 썰어 끓인 떡국이 설날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나이 먹는 것을 떡국 몇 그릇 먹었는지를 세기도 한다. 설날음식이 떡국이 된 까닭은 흰떡은 손으로 문지르는 대로 늘어나기 때문에 나이가 그렇게 늘어나고 수명도 길어지기를 바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하겠다.

〔놀이 문화〕 남자아이들의 대표적 놀이로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 겨우내 움츠렸던 하체의 건강을 위한 것들이 전통 민속으로 많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연은 원래 군사 첩보용 또는 군사 통신용으로 쓰던 것이다. 널뛰기는 주로 여자들 놀이인데 원래는 판무(板舞)라 해서 오끼나와에서 들어온 것으로 군사용인 월성장비(越城裝備)로 쓰던 것인데 놀이로도 활용이 되어 왔다. 윷놀이는 4개의 쪼갠 나무토막을 던져 젖혀지고 엎어지는 것으로 도, 개, 걸, 윷, 모의 숫자로 나타내 말 필이 먼저 나는 쪽이 이기는 설날의 대표적 가족 놀이인데 도는 돼지로 하나, 개는 개로 둘, 걸은 양으로 셋, 윷은 소로 넷, 모는 말로 다섯을 나타내서 가축 중 걸음 속도의 빠른 순서로 숫자의 크기를 정한 것이다.  

〔섣달 그믐의 풍속〕 설날의 풍속에는 반드시 그 전날인 섣달그믐의 민속을 알아야 한다. 본시 송년(送年)이나 망년(忘年)이란 말은 없었으며 섣달 그믐날을 수세(守歲) 혹은 제석(除夕)이라 하였고, 집안 곳곳에 등촉을 밝히며 한 밤을 지새웠다. 가는 세월이 아쉬워 이를 붙잡고자 안방 건넌방은 물론 화장실이나 우물, 심지어는 묘소의 작명 등에 까지도 곳곳에 불을 밝혔다. 아이들에게는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겁을 주었고, 그래도 잠에 취해 자는 아이에게는 눈썹에 분이나 밀가루를 발라 희어졌다고 놀려주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믐에 신발을 안고 자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야광귀(夜光鬼)라는 귀신이 아이들 신발을 밤에 신어보고 맞는 신발의 주인에게 병을 준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문 앞에 채나 어레미를 걸어놓아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호기심 많은 야광귀가 그 채의 구멍을 세다가 날이 밝으면 신을 신어보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설 전날을 까치설이라고 한 것은 길조인 까치가 반가운 새해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는데서 붙여진 것이다. 그 외 설날에 징과 북을 치고 때로는 폭죽을 터트리며 경쾌하게 온 마을을 순회하던 농악대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이는 새해에 액땜을 하고 풍년과 행운을 축원하는 행사이기도 하였다. 점차 사라져가는 민속들이 아쉬울 뿐이다.

『대보름』

〔날짜〕 ‘대보름’이란 음력 1월 15일이다. 그 해에 첫 보름이라 대보름이라 한다. 농경이던 우리문화에서 풍요의 상징이고, 음양사상에 의하면 태양은 '양'이고 남성이며, 달은 ‘음'이라 하여 여성으로 인격화 하였다. 달의 상징은 여신·대지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 출산력을 의미한다. 이같이 보름달은 풍요를 뜻하며 전통사회의 명절로 대보름(1/15)·백중(7/15)·한가위(8/15) 등 만월을 모태로 한 세시풍속들이 많다.

대보름의 민속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보이며, 관련행사는 하루 전일(14일)에 시작되고 14일을‘작은 보름’이라 하였다. 우리 민족은 대보름에 새해의 행운과 풍년을 바라는 소박한 염원을 담은 여러 민속들이 있으며 설보다도 더 즐거운 마을 공동체의 명절이었다. 설과 대보름은 상호 보완적이나, 설날이 개인적·폐쇄적·수직적이고 가족명절이라면, 대보름은 집단적·개방적·수평적인 마을공동체 명절로‘나에서 우리로’ 확장되는 세계관을 지닌다. 사적인 기복민속으로 부럼 깨물기·더위팔기·귀밝이술 마시기, 집단민속으로 줄다리기·다리 밟기·고싸움·탈놀이 등 다양하며, 쥐불놀이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흥겨운 민속 중 하나다.

한편 풍농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마을 사람이 모여 지신(地神)밟기, 차전(車戰)놀이 등을 벌이고, 나쁜 액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로 연줄을 끊어 하늘에 날려 보내기도 했다. 앞서의 쥐불놀이는 저녁에 보름달이 솟아오르면 논·밭의 두렁에 불을 질러 잡귀와 해충을 쫓는 민속이었고, 남녀노소가 집 근처의 다리로 나와 다리를 밟고 건너며 한해의 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고 믿어지던‘다리 밟기’는 요즘도 지역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 민속들이다. 

대보름날 새벽에 콩이나 잣·호두·밤 등 부럼을 나이 수대로 깨물며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기원하였다. 이 같은 견과를 '오도독' 소리 나게 깨무는 부럼은 부스럼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또 내내 기쁜 소식만 달라며 부녀자 애들 할 것 없이 귀밝이술(耳明酒)을 마셨으며, 또한 이 날은 세 집 이상의 남의 집 밥을 먹어야 그 해 운이 좋다며 오곡밥을 나누어 먹었다. 한편 더위 먹지 않고 여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이른 아침 친구를 찾아가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더위팔기이다.

이처럼 대보름은 새해 첫 만월이자 설이 끝나는 시점의 축제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대보름을 8대 축일의 하나로 중시하였고, 일본은 소정월(小正月)이라며 공휴일로 정해 명절로 삼았다. “설은 나가서 새어도 보름은 집에서 새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설 못지않게 중시하였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대보름에도 섣달그믐날 수세(守歲)하는 풍속처럼 온 집안에 등불을 켜놓고 밤을 새운다는 기록이 있다. 대보름의 민속은 우리 선조들의 관심사인 가족건강과 풍농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명절이며 화합과 소통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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