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균 교수(대진대 공공인재법학과)
김영균 교수(대진대 공공인재법학과)

지리산 빨치산부대(제3회)

“빨치산”이라는 말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유래된 '파르티잔(partisan)을 일컷는 말이다.

당원, 동지, 당파 등으로 번역되며 유격대원 또는 게릴라와 같은 의미로 새길 수 있다. 해방이후 38도선 이북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를 공산화할 계획으로 북한지역에 시군별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이 전국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남북동시선거로 한반도에 공산당에 의한 국가건설을 꿈꾸던 중 이러한 흉계를 눈치챈 이승만 대통령이 선수를 쳐서 남한만의 단일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유엔에 의하여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되었다. 공산당에 의한 단일정부수립을 목전에 두고 이승만대통령에 의한 대한민국이 건설됨으로써 김일성은 낭패를 보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들은 대한민국의 헌법체제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국가변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무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비정규 전투부대가 빨치산이고 정규전을 벌인 것이 6. 25동란이다. 이들의 뿌리는 조선공산당이고 남한지역에서 남로당이라는 이름으로 ‘여순반란사건’과 ‘대구폭동’을 일으켰다. 이승만정부는 여순반란을 진압하고 이들 잔당의 소탕에 나섰다.

이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국가전복과 변란을 시도하였는데, 빨치산 세력중에서도 지리산 빨치산이 가장 세력이 강하고 위협적이었다. 이들은 6.25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민군 패잔병들과 합세하여 남부군(南部軍)으로 편성하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들은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을 강탈하는가 하면 빨치산에 동조하는 주민들로부터 식량과 피복을 공급받았다. 6. 25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38도선 이북으로 패주하자 빨치산 공비들에게 식량과 피복을 공급하는 사람들도 이들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지리산으로 도피한 빨치산 아버지, 남편, 아들과 동생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간 남녀들을 원래의 구빨치와 구별하여 신빨치라고 불렀다. 빨치산들은 국군토벌대가 오는 대낮에는 지리산 깊숙이 숨어들고, 어둠을 틈타 마을로 내려와 약탈을 하거나 경찰을 습격하고 우익인사들을 학살하였다. 지리산빨치산은 이현상을 두목으로 하여 전성기에는 1개 사단급 병력을 거느릴 정도로 막강한 규모를 자랑하였다.

  1951년 1월 1일 월요일 중공군의 6개군이 38선을 넘어 3차공세를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춘천 서북방에서 야전군 포병의 엄호아래 총공세를 퍼부었다.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회문산 일대에서 국군의 후방을 교란하면서 기습전을 개시하였다. 해발 830m의 회문산은 반석같은 바위들이 약 4km에 걸쳐 뻗어 있고, 산의 둘레가 순창, 임실, 정읍, 담양 등 수 개의 시·군에 접해 있어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는 아주 적합한 천연의 요새였다. 빨치산들은 1950년 10월 부터 전북도당에서 빨찌산에 대한 유격전술과 정치학 강의를 하는 노령학원을 운영할 정도로 광활하였다. 회문산 일대를 비롯한 지리산 지구는 1951년 3월까지도 거의 빨치산 치하에 있었다. 특히 정읍·고창·남원·임실·순창 5개 군은 대낮에도 시가지가 습격을 받을 정도로 치안질서가 위험하였다. 이 지역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가 장악하던 곳으로 빨치산 사령관 방준표를 중심으로 이택부대・보위부대・백학부대・돌진부대・기대부대 등 의 직속부대와 전주시당유격대・김제군당유격대・임실군당유격대・순창군당유격대・완주군당유격대・익산군당유격대・진안군당유격대・무주군당유격대・장수군당유격대・남원군당유격대・고창군당유격대・부안군당유격대가 있었다. 

저작권자 © 안동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