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멘터리 장편소설

1회. 단발령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 경복궁 강녕전에서 가늘게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있었다.
“으으으음. 으음.”

  왕은 무언가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는 듯, 누군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에 팔을 휘저으며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으으음. 음.”

  점점 더 신음소리가 높아지며 넓은 침전 안을 가득 채웠다. 

“허헉!”

  결국, 고조된 신음소리만큼 무언가 짓눌렸던 것을 깨고 나오듯 왕은 잠에서 깨어났다. 또,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왕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왕후가 살해되고부터 줄곧 왕은 그날의 끔찍한 악몽을 반복해서 꿈으로 꾸었다. 왕후가 살해된 것이 10월 8일이었으니 벌써 한 달 하고도 칠일이나 지나 있었다.    

“중전······.”

  왕은 중전의 빈 잠자리를 손으로 쓸어보았지만 온기가 없는 싸늘함만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억울하게 죽은 왕후는 시신이 훼손되어 원통할 진데 거기다 폐서인 되어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니 이는 조선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음이었다.

  왕이 손을 뻗어 자리끼를 벌컥벌컥 마셨지만 갈증은 가시질 않았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하지만 왕은 더 자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기침하셨나이까?”

  문밖에 있던 내관의 목소리가 새벽공기를 안고 문안으로 들어왔다.

“그러하다.”

  이른 시각이지만 내관과 상궁들이 침전 안으로 들어 왕과 왕세자의 아침을 준비했다.

“일본군은 아직 있느냐?”

“망극하옵나이다.”

  왕의 하문에 읍하고 선 내관이 허리를 더욱 굽혔다.

  중전이 살해된 날부터 왕과 왕세자를 호위한답시고 무장한 일본군이 왕의 침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실상 왕과 왕세자는 유폐되어 있었다.

  왕은 그 날의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군부대신 안경수에게 이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의 군대를 해산토록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전한 일이 이토록 참담한 결말을 몰고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일국의 국모를 처참히 살해하고 왕과 왕세자를 감금하는 이런 일이 세상천지에 감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더냐? 짐이 오늘은 편전에서 정무를 볼 것이다.”

  왕이 분연히 일어나 문을 나서자 내관과 상궁들이 왕을 모시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무장한 일본헌병들이 위협적으로 왕의 앞을 막아섰다.

- 척척척척.

“비키시오.”

  내관이 큰 소리를 냈다.

“아니되무니다.”

  일본헌병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네 이놈들, 지금 뉘 앞을 막아서는 게냐? 썩 비켜라!”

  내관도 지지 않고 맞섰다.

“고무라 각하의 명이 없이는 저희는 물러 갈 수 없으무니다.”

  왕이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쳤다.

“그렇다면 고무라 공사를 데리고 오라! 여기는 짐의 궁이고, 짐의 나라에서 너희들이 지금 뭘 한다는 말이냐? 어서 비켜서라!”

  왕의 호통에 움찔한 일본군이지만 상부의 명이라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아바마마.”

  왕세자가 왕을 부축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있단 말이냐?”

“아바마마, 이런 때 일수록 심기를 굳건히 하오소서!”

“여기서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 나가서 저들의 끔찍한 만행을 알리고 일본에 아첨해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고는 5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야!”

  그때, 왕과 왕세자가 편전으로 가려는 걸음을 막은 일본군들 사이로 군부대신 유길준과 내장원경 정병하가 들었다.

“전하, 군부대신과 내장원경 들었나이다.”

  문밖에 읍하고 선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왕과 왕세자는 대신들이 들자 반가운 마음이 되었지만 짧게 자른 머리칼을 한 정병하와 유길준의 모습이 낯설었다.

“전하, 편히 주무셨나이까?”

“그러하다.”

“어디 불편해 보이시나이다. 불편함이 있으시나이까?”

  정병하가 여쭈었다.

“짐이 짐의 궁에서 어째서 편전에 들 수 없는가? 그리고 언제까지 일본군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가?”

  왕의 노기 띤 하문이 이어졌지만 정병하와 유길준은 아랑 곳 없이 말했다.

“그것은 아직 궁 안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일본군이 전하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오니 역정을 거두옵소서.”

“전하, 그보다 오늘은 대 일본 천황폐하의 명을 따르셔야 할 줄로 아옵나이다.”    

“그 일이라면 짐이 이미 하교하였다.”

“그렇다면 전하께옵서는 감히 천황폐하의 명을 거역하시겠다는 것이옵나이까?”

  유길준의 음성이 허공중에 날카롭게 원을 그렸다.

“짐의 백성들에게 머리칼을 자르고 의복을 고쳐입게 하는 것은 짐이 할 일이지 일본 천황이 간섭할 일이 아니다.”

“전하, 천황폐하의 명이옵나이다. 전하께옵서 이렇게 나오시니 백성들이 단발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옵나이다!”

  유길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번엔 정병하가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뭐라? 지금 경이 짐에게 단발을 하라는 말이더냐?”

“그러하옵나이다.”

  내장원경 정병하가 왕의 용안을 똑바로 보는 불충을 저지르며 말했다.

“물러가랏!”

  왕의 진노한 옥음이 복도를 울렸다.

“물러가라 하오시오!”

  옆에 읍하고 있던 내관이 대신들과 왕의 목소리 사이를 갈랐지만 정병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이는 저희 대신들의 뜻이 아니옵니다. 대 일본천황 폐하의 거절하셔서는 안 되는 명이옵나이다.”

  정병하는 왕과 내관이 물러가라는 데에도 아랑 곳 없이 문을 열어 자신이 데리고 온 무장한 일본헌병을 침전 안으로 들였다. 그 중에는 고무라 주타로도 함께 있었다.

- 척척척척척척.

  많은 무리의 일본헌병이 발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었고, 고무라가 가위를 든 쟁반을 안고 웃음을 흘렸다.   

“무엄하오!”

  내관과 상궁들이 이들을 막아서려 했지만 일본헌병들은 이들을 바닥에 제압하고 왕과 왕세자 곁으로 다가갔다.

“이게 대관절 무슨 짓이냐?”

  왕은 자신과 왕세자를 둘러싸는 일본헌병들을 보며 고무라 주타로와 정병하를 향해 옥음을 높였다.

“전하, 무탈하시무니까?”

  고무라가 일본 헌병들 속에서 왕께 무례하게 목례를 했다.

  유길준이 이제는 왕세자가 앉은 의자 곁으로 가 빙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전하, 전하께옵서 천황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이 궁에 또다시 그 어떤 참담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나이다.” 

“지금 짐을 겁박하는 것이냐?”

“감히, 제가 전하를 어찌 겁박하겠나이까? 다만 저는 참담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그것이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옵나이다. 전하께오서 백성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이신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니옵나이까?”

“아바마마.”

  무장한 일본헌병에 둘러싸인 왕세자가 겁에 질려 왕을 보았다. 아직 왕후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왕세자였다. 그런데 지금 유길준이 다시 궁에서 참담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곧, 왕인 자신이거나 왕세자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모범을 보이시지요.”

“지금 편전으로 가실 수도 없는 상황에 천황폐하의 명을 거역하신다면 뒷일을 장담할 수 없지만 단발령에 대한 모범을 보이신다면 뒷일을 도모해 보실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정병하와 유길준이 의기양양하게 왕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내부대신, 내장원경이나 되는 사람이 어찌 전하께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이오? 예로부터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여 머리칼만큼은 목숨처럼 손대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예법인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내관 하나가 일본헌병에 의해 제압당해 무릎 꿇려진 채 반항했다.

“예법, 예법 운운하다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걸 모르시니 하시는 말씀이지요. 내 머리칼을 자르고 보니까 이리 시원한 걸 왜 진작 하지 않았나 후회를 한단 말이오. 모르면 잠자코 있으시오!”

  정병하가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며 말했고, 유길준이 내관을 곱지 않게 노려보았다.

“큰일을 치르려는데 감히 내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니 그 입 다무시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참혹한 광경에 내관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아, 선택의 여지가 없나이다. 빨리 자르시옵소서! 만백성의 어버이께서 이토록 꿈지럭 대면 백성들이 어찌 따르겠나이까? 이건 엄연한 천황폐하의 명이옵나이다!”

  유길준과 정병하가 고무라에게 잘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앞 다투어 자신들의 왕을 향해 윽박지르듯 말했다.  

  왕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금 이 상황을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신하가 감히 왕의 옥체에 그것도 머리칼을 자를 수 있을 것인가?

  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르라······.”

“······.”

“내장원경 그대가 자르라.”

  왕의 한마디에 여지껏 왕을 윽박지르던 정병하와 유길준이 서로를 마주 보았고, 모두는 일순 잘못 들은 듯, 찬물을 끼얹은 듯,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만, 이제는 드러내 놓고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무라 주타로가 가위를 받쳐 든 쟁반을 앞으로 내밀며 한 발 나섰다.

“잘 생각하셨으무니다.”  

“아바마마.”

  왕세자가 눈물이 그렁한 눈을 들어 왕을 바라보았지만 어디에도 시선을 둘 수 없는 왕은 눈을 감고 말았다.   

  왕은 설마 자신의 신하가 감히 왕의 옥체에 손을 댈까 하는 마음 한 가닥을 잡고 있었는데 일본에 빌붙어 권력을 쥐려하는 정병하인지라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가위를 집어 들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내관과 상궁, 나인이 모두 한 목소리가 되어 통곡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정병하가 내관, 상궁들의 울음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웃음을 흘리며 감히 왕의 머리칼에 손을 대려 할 때였다.

“아악, 아니 되옵니다!”

  내관이 달려들어 가위를 빼앗으려 하자 정병하가 내관의 몸을 발로 걷어차 내관의 몸이 나가 떨어졌다.

“이런 내시 따위가 막중대사에 일을 그르치려 하다니!”

“아니 되오! 아니 되오!”

  내관이 일본헌병에 의해 몸을 제압당하면서도 악을 쓰며 막아 보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흑흑흑, 전하.”

  정병하는 더욱 빠르게 손을 놀렸고, 두 눈을 감은 왕의 머리칼이 ‘투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전하! 전하!”

  내관의 악을 쓰는 소리와 상궁, 나인들의 울음소리는 흡사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토해내는 듯하였다. 국운이 기운 왕의 가슴속은 울분으로 가득 찼지만 아무 말 없이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결국, 왕과 왕세자의 머리칼이 잘려나갔고, 왕은 이 고통을 안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전하, 전하, 흐흐흐흐흑.”

내관, 상궁, 나인들의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침전을 뒤덮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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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슬프다.

내가 죄가 크고 악이 커서···

천제가 돕지 않아···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다.

이로 인해··· 강성한 이웃나라는 틈을 엿보고

역신은 정권을 농락하고 있다.

하물며··· 나는 머리를 깎고···

면류관을 훼손했느니 4천년 예의의 나라가

나에 이르러 하루아침에

犬羊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불쌍한 우리 억조창생이

함께 그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하늘에 계신 열성조의 영혼을 뵙겠는가.

지금 형세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죄인인 나 한사람의 실낱같은 목숨은 

천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허나! 종묘-사직과 백성을 생각하매

혹시 만에 하나라도 보전될 수 있을까하여

충의의 의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애통한 조서를 내리노라.

  경복궁 안에 유폐되고, 신하에게 머리칼까지 잘린 왕은 한 글자 한 글자 피를 토하듯 조서를 써내려갔다.

  왕은 이제 어떻게든 이 경복궁에서 빠져 나가야한다고 결심했다. 조정대신들이 모두 일본의 앞잡이 부일배 노릇을 자청하고 있으니 믿을 수 있는 신하가 이제 조정 안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부일배 
부일(附日)은 “일본에 부역하다”라는 뜻으로 부일배라      
하던 것을 부일 하던 당사자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어      
부드럽게 친일파이라는 말로 바꿔 사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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