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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대통령상 국회

닉네임
andongdaily
등록일
2019-08-15 23:42:09
조회수
679
첨부파일
 이승만 건국대통령 상 국회.jpg (71365 Byte)
이승만(李承晩)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 독립협회, 한성임시정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선 후, 4·19 혁명으로 사임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우남(雩南),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1875년(조선 고종 12) 3월 26일(양력 4월 18일)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두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지냈다.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14년 박용만(朴容萬)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歐)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武斷派)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雩南派)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島山派)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7월 24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승만 [李承晩] (두산백과)
작성일:2019-08-15 23:42:09 36.39.241.5